간직의 또 다른 방식
나전상자는 귀한 것을 오래도록 품기 위해 태어났다. 겹겹이 쌓인 옻칠과 자개가 깊이를 이루어낸 석문진 작가(@seok_moonjin57)의 상자, 그 곁에 세심한 손길로 빚어진 주얼리가 놓이며 빛과 의미를 이어간다.
석문진, ‘폴더를 열다’
위 빛의 결을 엮어낸 듯한 매듭이 유려한 ‘매트릭스 와이 네크리스’. 구조적인 라인과 강렬한 광택, 다채로운 컷으로 반짝이는 지르코니아가 현대적인 세련미를 구현한다. 70만원 스와로브스키.
아래 어둠을 밝히는 가로등의 실루엣에서 착안한 ‘스트리트라이트 실버 이어링’. 매끈한 곡선이 우아하게 흐르고, 리듬감 있는 볼륨의 변화가 각도마다 다른 표정을 만들어낸다. 15만2000원 샴브리에.
석문진, ‘나전폴더상자’
왼쪽 행운과 부의 문을 여는 상징, ‘클라라키 목걸이’. 원형으로 정교하게 세팅된 스톤이 은은한 빛을 발하며 우아한 실루엣을 그려내고, 섬세한 디테일이 더해져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완성한다. 70만9000원 로제도르.
오른쪽 섬세함 속에 단단한 매력을 품은 ‘러키 키 실버 네크리스’. 키 펜던트 위에 세팅된 작은 별 조각이 은은히 빛을 발하며, 시선을 자연스레 머물게 한다. 25만7000원 샴브리에.
석문진, ‘폴더에 담다’
위 볼과 스톤이 리듬감 있게 배열된 ‘리듬볼(M) 팔찌’. 손목 위에서 가볍게 흔들릴 때마다 빛의 결이 다르게 번지며 여성스러운 무드를 한층 섬세하게 드러낸다. 177만원 로제도르.
아래 어느 각도에서나 빛을 담는 ‘덱스테라 스터드 이어링’. 로즈 골드 톤 후프에 클리어 크리스털 파베와 중앙의 스와로브스키 지르코니아가 어우러져 춤추듯 반짝인다. 19만9000원 스와로브스키.
작가님이 생각하는 동시대 공예로서 나전칠기의 가치는 무엇인가요?
나전칠기는 단순히 과거의 기법을 보존하는 전통공예가 아니라, 오늘의 시각과 감각 속에서도 새롭게 경험될 수 있는 매체예요. 자개는 빛과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신비로운 물성을 지니고 있어 디지털 이미지로는 대체할 수 없는 아날로그적 깊이를 전하지요. 특히 흑칠 위에서는 그 깊이가 극대화되고, 주칠과 만나면 화사함이 드러나 예로부터 왕실에서 사랑받았다고 해요. 여기에 방수·방충·항균 효과가 뛰어난 옻칠이 더해져,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동시에 담을 수 있다는 점도 큰 장점이에요. 저는 자개와 옻칠이 만들어내는 물성이야말로 나전칠기의 본질적 가치라고 봅니다. 다만 그 깊이감을 지키면서도 반복된 형식과 문양은 과감히 바꾸려고 해요. 조선시대 양식이나 1970~80년대 자개장의 패턴을 답습하기보다는, 오늘의 감각에 맞는 새로운 조형과 언어로 재구성할 필요가 있어요. 전통적인 기법은 유지하되 ‘상자’라는 오브제에 디지털 아이콘이나 현대적 패턴을 접목해 새로운 의미를 만드는 것, 전통의 기술과 현대의 언어를 교차시키는 지점이 제 작업의 핵심이에요.
‘폴더에 담다’ 시리즈는 디지털 아이콘을 아날로그로 풀어낸 시도가 인상적입니다.
저는 디지털 환경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언어와 감각을 작품에 담고자 해요. ‘폴더’ 시리즈는 누구나 익숙한 컴퓨터 아이콘을 아날로그 상자로 옮긴 작업으로, 현대인의 기억과 사용성을 자연스럽게 불러오는 작업이었어요. 자료와 이미지가 가상의 폴더 속에 쌓이는 과정을 보며, ‘보이는 화면 너머의 보이지 않는 공간’을 공예적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죠. 이를 3차원 상자로 구현함으로써 물질적 공간이 디지털로, 다시 디지털이 아날로그로 이어지는 과정을 시각화하고자 했어요. 전통 오브제인 상자를 현대인의 생활 방식과 연결하고, 동시대적인 미적 감각으로 확장하려고 합니다.
모든 작품에 물푸레나무를 사용하신다고 들었어요. 이 나무가 지닌 매력은 무엇인가요?
제가 자주 사용하는 물푸레나무는 단단하면서도 탄성이 뛰어나 예로부터 활 제작에 쓰였으며, 현재도 ‘애시(Ash)’라는 이름으로 고급 가구에 활용됩니다. 또한 물에 담그면 물빛이 푸르게 변하는 독특한 성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적당한 강도와 고운 결 덕분에 옻칠과 자개를 받쳐주는 이상적인 재료로, 나뭇결이 칠을 통해 은은히 드러나면서 작품에 깊이를 더해줘요. 단순히 구조적 재료를 넘어 제 작업의 분위기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하죠.
제 작품이 단순히 화려한 장식품으로 기억되기보다는,
시간이 켜켜이 쌓인 깊이와 사유의 경험으로 다가가길 바랍니다.
작품 앞에 잠시 머물러 빛의 변화, 표면의 결,
담긴 이야기들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이 제가 바라는 가장 큰 감상입니다.
자개를 붙이고 옻칠을 거듭하는 긴 과정 속에서,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가장 몰입하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 데는 보통 3개월에서 길게는 6개월이 걸려요. 자개를 조각내어 붙이고 옻칠을 여러 차례 반복하는 과정은 시간이 많이 들고 매우 섬세한 집중을 요구하지요. 그중에서도 가장 몰입하는 순간은 마지막 상칠을 올리고 곱게 갈아내는 단계예요. 자개가 칠 속에 묻히지 않으면서도, 이전 칠이 드러나지 않도록 해야 하므로 작은 실수도 용납되지 않아요. 그 과정을 지나 표면이 서서히 빛을 머금기 시작하면 작품이 마치 숨을 쉬는 듯이 느껴집니다.
작품을 사용할 수 있는 오브제로 제안하시는 이유와, 오늘날 상자가 지닌 의미는 무엇인가요?
저는 함을 단순한 저장 용기가 아니라 내밀한 이야기를 담는 그릇으로 봅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디지털 폴더나 수납공간을 통해 ‘저장’의 행위를 반복하고 있죠. 저는 이 보편적 행위를 상자라는 오브제로 제안하며 과거와 현재를 잇고 싶어요. 과거에는 서류함이나 관복함처럼 실생활에서 꼭 필요한 상자가 많았지만, 지금은 거의 사라졌어요. 그렇다고 상자의 의미가 사라진 건 아니지요. 예전의 나전 상자가 복을 기원하는 장식적 역할을 했듯, 오늘날에도 상자는 단순한 기능을 넘어 상징적이고 의미 있는 오브제로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기능은 달라지더라도 그 의미와 역할은 여전히 유효하며, 저는 전통의 상자가 오늘날 어떤 모습으로 제안될 수 있을지 계속 탐구하고 있어요.
작품이 관객에게 어떤 감정이나 경험으로 남기를 바라나요?
제 작품이 단순히 화려한 장식품으로 기억되기보다는, 시간이 켜켜이 쌓인 깊이와 사유의 경험으로 다가가길 바랍니다. 작품 앞에 잠시 머물러 빛의 변화, 표면의 결, 담긴 이야기들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이 제가 바라는 가장 큰 감상입니다. 또한 관객이 제 작품을 과거 할머니 집에 있던 낡은 자개장이 아닌, 현재의 동시대 공예로 인식하기를 바라요. 예전에는 나전 상자에 인삼과 같은 귀한 물건을 담아 선물하고, 받은 사람은 내용물을 꺼낸 뒤 자신의 귀중품을 담아 간직했다고 해요. 저는 누구나 자신만의 상자 하나쯤 갖고 싶어 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선물을 담은 상자 자체가 또 다른 선물이 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습니다.
CREDIT INFO
editor김소연
photographer김잔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