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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키운 브랜드

하나의 브랜드가 탄생하고 성장하는 일은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는 것만큼이나 신비한 일이다. 양육자의 역량과 주변 환경이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브랜드가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으려면 아이를 키우는 것처럼 세심한 관심과 애정, 전략 등이 필요하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마을 하나가 필요한 만큼 브랜드를 키우기 위해서도 든든한 동료들이 함께해야 하는 법. 여기 가족이 힘을 모아 더 특별하게 일구어가는 브랜드가 있다. 가까운 사람끼리는 절대 동업하면 안 된다는 말은 이들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브랜드를 함께 키워나갈 보석 같은 동료를 찾은 네 가족의 특별한 브랜드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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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엽편주의 탁주. 스튜디오 긷에서 활판인쇄한 띠를 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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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엽편주는 농암종택의 현판과 마주 보고 선 작은 술도가에서 아주 조금씩 생산한다. 귀한 술이다 보니 600여 년간 농암종택에 들르는 손님에게 내어주거나 관혼상제 때만 사용했다.

권잔디 대표와 종부 이원정 씨가 이 달에 나온 술의 포장을 마무리하고 있다.

권잔디 대표와 종부 이원정 씨가 이 달에 나온 술의 포장을 마무리하고 있다.

일반 관람객에게 일정 부분 개방되어 있을 뿐 아니라 고택 체험도 운영 중인 농암종택은 지나는 손님들을 위해 휴식할 장소도 마련해두었다.

일반 관람객에게 일정 부분 개방되어 있을 뿐 아니라 고택 체험도 운영 중인 농암종택은 지나는 손님들을 위해 휴식할 장소도 마련해두었다.

 

술잔에 술을 부어 조그만 나무 뗏목에 올려 띄워 보내니 퇴계가 아래에서 웃으면서 받아 마시기를 왕복 서너 차례.
《농암집》 1547년 7월

 

‘병의 목을 매는’ 단계라고 불리는 이 과정을 함께하는 모습.

‘병의 목을 매는’ 단계라고 불리는 이 과정을 함께하는 모습.

고부가 함께 만든 고생창연 一葉扁舟

농암 이현보는 조선 후기 연산군과 중종 때의 문신이자 학자다. 32세에 관직에 나아간 뒤 호조참판까지 지낸 후 76세에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왔다. 더 큰 벼슬을 주겠다는 왕의 만류도 소매를 뿌리쳐 거절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강호에 살기를 택한 그 소박한 심성을 본받고자 후배 선비들이 그를 자주 찾았는데, 그중엔 퇴계 이황 선생도 있었다. 돌아가고자 한 고향은 어떤 모습일까? 농암 종택 앞마당은 경북의 젖줄이라 불리는 낙동강이 굽이굽이 흐르고, 그 물길을 청량산이 감싼 풍경이 보이는 곳.

너른 평지에 자리한 농암종택의 현판에서부터 강이 돌아나가는 곳 근처에 있는 정자 ‘강각’까지, 켜켜이 겹쳐지는 처마는 한 폭의 그림처럼 수려하다. 집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농암의 마음을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농암은 이 풍경을 병풍처럼 두르고 벗들과 마시려 집에서 술을 담그도록 했다. 그 술이 지금의 일엽편주(一葉扁舟)다. 조그마한 한 척 배라는 뜻. 이 술은 600년 세월을 대대로 종부의 손을 통해 전해져 내려왔다. 지금은 17대 종부 이원정 씨가 안동 가송리의 농암종택에서 직접 술을 익힌다. 일엽편주는 물, 쌀, 종부가 볕에 직접 말리고 고른 누룩만을 이용해 만든다.

두 차례의 발효와 40일간의 숙성을 거치고 나면 술은 두 층위로 나뉜다. 위에 뜬 맑은 술은 청주이고, 바닥에 가라앉은 뽀얀 술은 탁주다. 이렇게 100일간의 발효 과정을 더 거쳐야 일엽편주가 된다. 잘 숙성된 쌀 술에서만 나는 특유의 산미는 복숭아와 배의 달콤하고 시큰한 맛을 닮았다. “열처리는 따로 안 해요. 누룩이 그대로 살아 있는 가양주, 그러니까 여과를 안 한 술이라 시시각각 맛이 달라요. 시간을 두고 여러 번에 걸쳐 맛보며 신맛과 향이 달라지는 걸 느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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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긍구당과 안채 곁에는 봄이면 벚꽃이 만발한다.

“술을 익히는 방법은 날씨에 따라 다르죠, 어떤 날은 열어두고 어떤 날은 닫아둬야 해. 누룩 맛도 중요한데 술이 숨을 쉬는 게 중요하니까 그래요.” 종부가 누룩을 고르며 말했다. 말려둔 누룩은 지나가던 새도 쪼아 먹고, 마당에서 낮잠을 자던 들고양이도 한 입씩 주워 먹는다.

“술을 익히는 방법은 날씨에 따라 다르죠, 어떤 날은 열어두고 어떤 날은 닫아둬야 해. 누룩 맛도 중요한데 술이 숨을 쉬는 게 중요하니까 그래요.” 종부가 누룩을 고르며 말했다. 말려둔 누룩은 지나가던 새도 쪼아 먹고, 마당에서 낮잠을 자던 들고양이도 한 입씩 주워 먹는다.

청량산 자락 밑 봄꽃이 만발한 4월의 농암종택.

청량산 자락 밑 봄꽃이 만발한 4월의 농암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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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익히는 방법은 날씨에 따라 다르죠, 어떤 날은 열어두고 어떤 날은 닫아둬야 해. 누룩 맛도 중요한데 술이 숨을 쉬는 게 중요하니까 그래요.” 종부가 누룩을 고르며 말했다. 말려둔 누룩은 지나가던 새도 쪼아 먹고, 마당에서 낮잠을 자던 들고양이도 한 입씩 주워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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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부 이원정 씨가 권잔디 대표에게 안채에서 강각까지 이어지는 산책로를 따라 핀 꽃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알려주고 있다.

일엽편주의 청주.

일엽편주의 청주.

고색창연하게 다시 태어나다

최근엔 일엽편주를 맛볼 수 있는 곳이 서울에 여럿 생겼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일엽편주를 즐길 수 있게 된 건 며느리 권잔디 대표의 브랜딩 덕분이다. 그녀는 평창동 중정갤러리에서 큐레이터로 일한 감각을 바탕으로 일엽편주를 브랜드로 만들어볼 것을 시어른께 제안했다.

“이걸 아는 사람들끼리만 즐긴다는 게 아쉬웠어요. 600년을 이어온 선비의 유유자적 정신이잖아요. 더 잘 포장해 많은 사람에게 알려보자고 결심했죠.” 그는 일엽편주를 일엽편주답게, 농암 이현보 선생의 소박함을 담아 완성하기 위해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 한지에 손으로 활판인쇄를 직접 하는 서촌의 인쇄소 ‘긷’과 농암종택의 사위를 두른 산과 강의 이미지를 만들었고, 퇴계 이황이 존경과 애정을 담아 농암 이현보 선생에게 써준 <어부가> 속 ‘일엽편주’ 글자를 집자해 병목에 둘렀다.

술이 목구멍으로 넘어갈 때 느껴지는 순한 청량감은 병을 보자마자 느껴진다. 일엽편주라는 브랜드를 만든 이후, 농암종택을 찾는 젊은 관광객이 더욱 늘었다. 일엽편주를 통해 농암종택의 가치를 알게 된 이들이 종부와 종가에 더욱 예를 갖추게 된 듯하다는 게 고부의 생각. “저는 시부모님과 공감대가 생겨 좋아요. 사업 외에도 강호문학, 조선 시대 영남 역사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죠.”

일엽편주의 인스타그램(@ricewinery)과 홈페이지(www.ellteppyunjoo.com)는 농암종택에서 느낄 수 있는 미감과 종가가 이어온 전통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한편 모던하고 감각적이다. 이 감성이 전국 각지 멋쟁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만은 분명하다. 일엽편주는 SNS에 술이 다 익었다는 소식을 업로드하기가 바쁘게 채 몇 시간도 되지 않아 품절이 된다.

“많이 팔기 위해 만든 브랜드는 아니에요. 모두가 어렵고 힘든 시대잖아요. 잠시라도 농암 선생의 풍류를 느끼며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어요.” 봄과 여름에 가장 맛있다는 일엽편주의 탁주. 이번에 담근 술엔 입 안에 연잎 향이 은은하게 남는 게 특징이다. 정제하거나 여과하지 않은 이 맛은 고부가 함께 만든 농후한 순미이자 안동 자연의 정취 그대로다.

 

CREDIT INFO

editor 심효진, 김의미, 박민정 기자, 임지민(프리랜서)

photographer 이지아, 정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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