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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로에베 재단이 개최한 ‘2022 로에베 재단 공예상’의 결선에 오른 작품 30점 속에 국내 작가 7명의 작품이 포함된 일은 연일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그중에서도 많은 이의 눈길을 사로잡은 작품이 있었으니, 가죽을 가늘게 잘라 붙여 완성한 레더 볼. 바로 김준수 작가의 ‘숲의 감각’이다.

그의 작업을 들여다보면 반전에 반전을 거듭 경험한다. 나무를 깎아 만든 볼인 줄 알았는데 가만히 보니 가죽이고, 그것도 얇은 가죽 끈을 하나하나 이어 붙여 완성한 것이라니! 현대 공예에서 보기 어려운 가죽이라는 소재와 로프 형태를 층층이 쌓아 올리는 코일링 기법.

이렇듯 흥미로운 재료와 방식으로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 김준수 작가는 본래 국민대학교에서 금속공예를 전공했다. 가볍게 손을 풀 겸 취미로 접해본 가죽에 완전히 매료되었고, 이탈리아 토스카나주의 산미니아토(San Miniato)에서 열린 가죽 워크숍에 참가하면서 만난 식물성 무두질 가죽은 그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베지터블 레더(vegetable leather)라고도 부르는 식물성 무두질 가죽은 열매, 껍질 등 친환경적인 식물성 재료로 가공한 가죽을 일컫는다. 워크숍에서 식물성 무두질을 깊게 탐구하고 자유롭게 실험하며 ‘나는 가죽을 해야겠다’는 결심이 선 김준수 작가는 한국으로 돌아와 다양한 가죽 작업을 시도했다.

이때 가방을 만들고 버려지는 자투리 가죽들에 시선이 옮겨갔고, 이를 최대한 살리는 방법을 고민한 끝에 그가 선택한 것은 가죽을 가늘게 자르는 일이었다. 이렇게 작은 평면부터 시작한 작업은 점차 면적이 넓어지고 입체로 올라가며 구조적으로 확장되어 지금의 ‘레더 볼’에 이른 것. 천천히 성장하는 나무의 나이테처럼 점차 진가를 드러낸 그의 작품을 이제는 모두가 주목하고 가죽의 고유한 멋을 음미하고 있다.

김준수 작가의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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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을 돌보는 순간
작업하는 동안은 같은 자세로 앉아 장시간 움직이지 않다 보니 그 외 시간에는최대한 움직이려고 하는 편입니다. 아침에는 수영을 하고 작업 중간에는작업실에서 키우는 식물을 돌보거나 반려견과 산책을 나가기도 하죠. 자연과식물은 큰 영감을 줘요. 예를 들어 몬스테라 중에 알보라는 희귀종이 있는데,광합성을 못하면 잎이 하얗게 변하는 돌연변이종이에요. 이 잎의 독특한 패턴을가죽 작업에 접목하기도 했죠.

녹색과 흰색의 색다른조합을 보여준 ‘ALBO’. ⓒ KC Studio

녹색과 흰색의 색다른조합을 보여준 ‘ALBO’. ⓒ KC Studio

 


가죽 선을 한줄 한줄씩 천천히 쌓아 올리는 과정,
그리고 완성된 결과물이 나무의 나이테 같은 느낌이 났어요.
형태를 머릿속으로 상상하면서 천천히 만드는 일이
어쩌면 나무가 성장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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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순간
가죽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계기가 되어준 이탈리아 식물성 무두질 워크숍에 언젠가 제 작업이 알려졌으면 좋겠다고생각하고 있었어요. 반갑게도 당시 프로그램을 기획하신 분이 연락을 주셨는데, 가죽 태너리 협회로부터 식물성 무두질 가죽을제공받아 작업하고, 협회에 작품을 기증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제안했어요. 돌아보니 9년 만에 다시 이어진 인연이더라고요.가장 기억에 남는 행복했던 순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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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와 쉼의 순간
작업을 하기 전에 오늘 해야 할 목표량을 생각하고작업을 시작합니다. 그래야 중간에 늘어지거나 일정이밀리는 상황이 일어나지 않거든요. 그리고 작업을마치고 퇴근하기 전에는 꼭 작업대 정리를 합니다. 다음날 작업대가 어질러져 있으면 어제의 피곤함과 어수선한마음이 이어지는 기분이거든요. 커피를 내려 마시면서휴식을 취하는 것도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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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에 푸른 식물이 온기를 더하는 김준수 작가의 작업실.

Q 로에베 재단 공예상의 파이널리스트로 오르셨던 소감은 어떠셨나요?
스페인에서 역사적으로 권위 있는 가죽 브랜드인 로에베에서 가죽 작업으로 파이널리스트에 선정되었다는 사실은 저에게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에요. 제가 알기로는 로에베 재단에서 첫 회부터 지금까지 선정한 파이널리스트가 약 150명 정도인데, 가죽 분야로는 제가 처음이라고 해요. 이를 계기로 가죽공예가 세계적으로 좀 더 알려졌으면 합니다.

Q 금속공예를 전공했는데 가죽에 빠지셨다고요.
학부생 시절 군대를 전역하고 한 학기 정도 텀이 있었어요. 그때 손도 풀 겸 취미로 해볼까 가볍게 가죽을 다뤘죠. 금속과는 상반된 재료의 특성이 매력적이었어요. 당시 금속 외에 다른 재료를 사용하는 것에 목말라 있던 와중에 가죽을 만난 거죠. 가죽과 금속을 혼용하기도 하면서 다양한 작업을 시도했어요.

Q 이탈리아에서 열린 워크숍이 중요한 변곡점이셨던 것 같아요.
대학원에 진학해 재료와 기법을 더 깊이 탐색하면서 식물성 무두질이라는 가죽 재료를 알게 되었어요. 마침 일본 히코미즈노 학교의 멘토 선생님 초청으로 이탈리아 식물성 무두질 가죽 협회에서 마련한 워크숍에 운 좋게 참가하게 되었죠. 현지 가죽 장인들의 작업 과정을 살펴보면서 식물성 무두질 가죽을 자유롭게 실험해볼 수 있었고, 작업의 방향성을 잡을 수 있었어요.

Q 식물성 무두질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건가요?
무두질은 쉽게 얘기하면 가죽을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재료로 썩지 않도록 가공하는 거예요. 이 무두질이 여러 갈래로 나뉘는데, 친환경적인 식물성 재료를 사용하면 식물성 무두질, 베지터블 레더라고 부르기도 하고요. 화학적인 재료를 사용해 가공하면 크롬 레더라고 불러요. 2가지 재료를 혼합하기도 하죠. 제가 작업하는 건 바로 식물성 무두질 가죽이에요.

기계를 이용해 가죽의 밑작업을 하고 있다.

기계를 이용해 가죽의 밑작업을 하고 있다.

가죽 작업을 위한 재료들.

가죽 작업을 위한 재료들.

 
가는 선으로 자른 가죽을 한줄 한줄 이어붙여 형태를 만든다.

가는 선으로 자른 가죽을 한줄 한줄 이어붙여 형태를 만든다.

 

 

Q 크롬 레더와 어떻게 다른가요?
각 재료마다 장단점이 있어요. 크롬 가죽은 제작 과정도 훨씬 빠르고 색상도 자유롭게 적용할 수 있죠. 화학 재료를 사용했기 때문에 마찰이나 외부 환경에 보다 강하고, 시간이 지나도 크게 변하지 않아요. 식물성 무두질 가죽의 경우에는 식물에서 얻은 껍질과 열매를 사용해 가공하기 때문에 제작 시간도 오래 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표면이 점차 어두워지고 마찰에도 약한 편이죠. 하지만 재료뿐만 아니라 과정에서도 환경을 고려하기 때문에, 처음에 가죽을 들여올 때도 가죽을 생산하기 위한 도축이 아니라 육류 시장에서 발생하는 부산물을 사용하고, 가공 과정에서 나오는 폐수도 정화를 해요. 올바르게 만들어서 올바르게 오래 쓰자는 것이 이 가죽 생산의 취지인 것이죠.

Q 가죽 선을 쌓아 올리는 코일링 기법도 워크숍에서 영감을 받으신 건가요?
그건 아니에요. 한국에 돌아와 식물성 무두질 재료에 대한 논문을 쓰고 작업을 하면서 문득 버려지는 자투리 가죽들이 아깝더라고요. ‘작은 면적의 가죽이라도 이를 선으로 잘라 짧은 단위로 사용하면 최대한 부산물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했죠. 이런 방식이 식물성 무두질 가죽을 생산하는 분들이 추구하는 방향성을 따라가는 것 같아요.

Q 만드는 과정이 재료의 시작과 맞닿아 있군요.
가죽 선을 한줄 한줄씩 천천히 쌓아 올리는 과정, 그리고 완성된 결과물이 나무의 나이테 같은 느낌이 나더군요. 어쩌면 식물로 돌아간다고 해야 할까요. 전개도를 접어서 만들거나 순식간에 형태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형태를 머릿속으로 상상하면서 천천히 만드는 일이 어쩌면 나무가 성장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나이테도 환경과 날씨, 온도에 따라서 달라지잖아요. 날이 추우면 좁아지고 더우면 넓어지듯이, 길고 짧은 선들을 불규칙하게 쌓아 올려나가는 과정에서 당시 가진 생각과 감정, 기분, 미감이 계속 형태에 반영돼요. 비슷한 형태라 하더라도 저마다 다른 패턴을 지니게 되는 이유죠.

Q 초기 레더 볼 작업에서 변화한 부분이 있나요?
제가 금속공예를 전공했다 보니 초반에는 기능성이 있는 테이블웨어 쪽으로 접근했어요. 실제로 사용할 수 있도록 오염을 최소화하고, 세척이 가능한 방법을 고민해보고 가죽과 가장 잘 어울리는 천연 재료인 옻칠을 택했어요. 옻칠로 마감해 기능적인 부분을 보완한 거죠. 그런데 오히려 완성된 형태나 질감에서 제가 추구하는 가죽의 매력과 특성이 가려진다고 느꼈어요. 이후로는 기능에 얽매이기보다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더 명확하게 드러내자고 생각했죠. 예술적인 오브제로 더 나아가야겠다고요. 형태적으로도 초반에는 무언가를 담았을 때 안정감 있게 하기 위해 바닥이 넓은 함지박 형태였다면, 요즘에는 형태의 긴장감을 위해 바닥이 점점 좁아지고, 가죽의 텍스처가 표면에 잘 드러나게끔 작업하고 있어요.

Q 앞으로 또 어떤 작업을 보여주실 건가요?
아직은 조금씩 시도하고 있는데, 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다 보니 나무와는 다른 가죽만의 특별함을 어떻게 끄집어낼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나무에서 볼 수 없는 색상들을 조합하는 식이죠. 가죽만의 향, 질감, 여러 감각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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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예올 북촌가에서 열린 두 번째개인전〈Time fo/r/est〉전시 전경.

 

CREDIT INFO

에디터 이승민

photographer 김덕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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