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형과 삶 사이, 유리의 시간
몸 위에 얹히는 가장 작은 오브제, 주얼리를 통해 예술가의 감각과 태도, 사유의 결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예술과 일상이 스미는 지점, 그곳에서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 안나리사 작가. 그녀의 작업물마다 두 세계의 간극을 좁혀가는 고유한 시선이 깃들어 있다.
저는 자연을 ‘디테일’로 받아들여요.
집에 돌아가는 길에 맡았던 래브라도 티의 향기,
숲에서 손바닥으로 느낀 소나무 껍질의 거친 결 같은 것들요.
그런 감각들이 저에겐 늘 작업의 출발점이 되어줘요.
Q. 핀란드에서 시작된 유리 작업이 어떻게 한국까지 이어지게 되었나요?
저는 핀란드의 대학에서 도자와 유리공예 디자인을 전공했어요. 사실 한국에 오게 된 건 단지 몇 년만 살아보자는 마음에서였죠. 그런데 남편과 함께 남양주에 공방을 짓기 시작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어요. 하루하루 작업에 몰두하다 보니, 어느새 이곳이 제 삶의 중심이자 유리 작업의 기반이 되어 있었죠. 돌아보면 제가 한국에 정착했다기보다, 유리와 공방이 저를 이곳에 머물게 만든 것 같아요. 이곳에서 공예 기술을 다지고, 유리를 통해 저만의 예술적 언어를 만들어갈 수 있었던 건 꽤 큰 전환점이었어요.
Q. ‘항아리’ 시리즈는 대표작 중 하나인데, 항아리에 매혹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시작은 한국 도자기에 대한 깊은 애정에서였어요. 달항아리 특유의 소박하고 너그러운 형태, 고려청자가 지닌 섬세하고 유려한 선들이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답게 다가왔죠. 그 세계를 유리라는 물성을 통해 표현해 보고 싶었어요. ‘항아리’ 시리즈는 핀란드에서 나고 자란 저의 시선과 한국에서 보낸 시간들이 만나는 지점이에요. 두세 개의 ‘항아리’ 화병을 나란히 놓으면, 어느 순간 한국의 산맥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Q. 작업에서 두 문화가 중첩되는 듯한 인상이 강합니다.
한국에서 지내지 않았다면 제 작업은 지금과 전혀 달랐을 거예요. 이곳의 삶은 저를 조금 더 유연하게 만들었고, 감정도 보다 투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죠. 하지만 여전히 단순함과 명료함을 추구하는 핀란드적인 기질이 남아 있어요. 두 감성은 충돌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며 작업에 녹아들어요. 그 균형이 지금의 작업 언어를 만드는 힘인 것 같아요.
Q. 어린 시절 경험한 핀란드의 자연은 작업에 어떻게 담기나요?
저는 핀란드 동부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자랐어요. 숲과 눈, 고요한 빛 속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아주 미세한 변화나 디테일에 집중하는 감각이 자라났죠. 나비 날개의 부드러운 촉감, 눈 덮인 전나무 위로 스치던 햇살, 숲에서 맡은 래브라도 티의 향기, 손바닥으로 느낀 소나무 껍질의 거친 결 같은 기억들이 지금도 작업의 출발점이 돼요.
Q. 유리라는 재료에서 오는 특별한 영감도 있을까요?
유리는 온도의 미묘한 변화에도 반응하는 아주 예민한 재료예요. 몇 초만 타이밍을 놓쳐도 몇 시간의 노력이 산산이 깨질 수 있죠. 그래서 늘 겸손하게 만들어요. ‘이젠 다 알았다’고 말할 수 없는 재료라서 오히려 더 매력적이에요. 배울 것이 남아 있고 더 깊이 들어갈 여지가 있다는 점이 저를 계속 움직이게 하죠.
Q. 생활에 맞닿은 공예 작품도 많습니다. 실용성과 예술성의 균형은 어떻게 보나요?
저는 손으로 감각할 수 있는 것들에 끌려요. 물건의 무게, 표면 온도, 질감 같은 요소들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손에 쥘 수 있는 오브제를 만들게 돼요. 저에겐 기능성과 예술적 표현이 분리된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조화예요. 손에 쥐었을 때의 감촉, 빛을 받았을 때의 반응, 그 모든 것이 작품 경험에 포함되죠.
Q. 작업실과 정원이 맞닿아 있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올해는 정원에 손을 많이 못 댔지만, 창밖의 초록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돼요. 정원을 가꾸는 일과 유리를 다루는 일은 닮았다고 생각해요. 조화를 위해선 오랜 시행착오와 자연의 법칙을 받아들이는 겸허함이 필요하거든요. 목련 가지를 잘라 제가 만든 화병에 꽂을 때, 두 세계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평온함을 느껴요.
Q. 시간 속에서 작업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유리 블로잉은 머리로만 익힐 수 없는 기술이에요. 시간이 쌓이면서 테크닉은 단단해졌지만, 가끔은 예전의 거칠고 날 것 같은 감성이 그리울 때도 있어요. 요즘은 투명한 유리와 매트한 표면 사이의 대비에 매료돼 있어요. 그간 기능적인 오브제 작업이 많았는데, 앞으로는 좀 더 개념적인 작업에도 시간을 들여보고 싶어요.
editor김소연
photographer김잔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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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월 작가가 빚어낸 꽃, 그리고 주얼리의 숨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