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훈의 집과 낭만 44
아트페어에서 길을 잃다
후회해야 인생이다.
나도 후회하는 것들이 있다. 아니다. 나는 항상 후회한다. 후회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 사실 인생은 후회로 가득하다. 후회가 없다면 그것은 제대로 된 인생은 아닐 것이다. 사랑에 있어서라면 나는 거의 모든 과거의 결정을 후회한다. 몇몇 사람은 반드시 잡았어야 했다. 돌아보니 그렇 다. 그때는 몰랐다. 너무 지엽적이고 독단적인 이유로 헤어진 사람들 생각을 종종 한다. 물론이다. 나의 지엽적이고 독단적인 이유에서였다. 책을 읽지 않는다는 이유로 헤어진 적도 있다. 아무리 그래도 글쟁이와 연애를 하려면 책은 좀 읽어야 할 것이 아니냐. 어리석은 자여. 너도 책을 사기만 하고 잘 읽지 않는 타입이 아니더냐. 그래도 내 집 곳곳에 쌓여 있는 책을 심드렁하게 바라보며 “난 책은 안 읽어”라며 유튜브만 보던 분과 계 속 만날 수는 없었다. 역시 어리석다. 유튜브라도 보는 게 어딘가.
미래가 없어 보인다는 이유로 헤어진 것도 참으로 어리석었다. 미래? 웃기시네. 나이 들고 보니 나도 미래를 모르겠다. 내일도 예측하기가 힘들다. 미래학자들도 미래를 예측하는 데 거의 실패했다. 내가 보기에 21세 기를 정확하게 예측한 유일한 미래학자는 새뮤얼 P. 헌팅턴밖에 없다. 그가 1990년대 중반《문명의 충돌》을 냈을 때만 해도 모두가 비웃었다. 냉 전이 끝나고 세계가 하나가 되어가던 시절이다. 무슨 문명의 충돌인가. 그가 옳았다. 지금 세계의 가장 거대한 충돌은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 사이에 벌어지고 있다. 어쨌든 이 책은 독자 여러분에게 강력하게 추천한다. AI의 시대에도 가끔은 읽을 만한 교양서라는 게 존재한다. 새뮤 얼 P. 헌팅턴의 연애사가 어땠을지는 나도 알 수 없다. 위키피디아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도 죽기 직전에는 후회하는 일들이 있었을 것이다. 예측하지 못했다며 후회하는 것들이 있었을 게 틀림없다.
지금 내가 가장 후회하고 있는 건 지난 연애는 아니다. 얼굴도 잘 기억나 지 않은 사람들과의 연애를 후회해 봐야 별 소용 없다. 사실 내가 후회하 는 건 지난 ‘키아프 서울’에서 용기를 내어 그림을 사지 않았다는 것이다. 올해는 ‘프리즈 서울’에 가질 못했다. 파티에 초대를 받았는데 시간이 없었다. 아니다. 실은 서울 힙스터들이 모조리 한자리에 모여 있는 걸 1시간 이상 버틸 수가 없을 거라 생각했던 탓이다. 시간이 없기도 했다. 지난 몇 년간 한국 아트 시장은 놀랍도록 성장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그림을 사고 싶었다는 말이야?’라며 속으로 흠칫 놀랄 정도로 어떤 전시를 가도 성황이었다. 다만 프리즈 서울의 문제가 있다. 거기서 마음에 드는 그림을 사려면 주머니 사정이 좋아야 한다. 프리즈 서울은 세계 최고의 갤러 리들이 가지고 나온, 지금 가장 핫한 작가들의 그림이 가득하다. 거기서 가격을 묻는 사람은 두 종류다. 정말로 그림을 살 재정적 자신이 있는 사람과 그림 가격으로 기사를 써야 하는 기자들이다. 나는 둘 다 아니다. 영화 평론가 명함은 프리즈 서울에서 별 소용이 없다.
올해 프리즈 서울에서는 하우저앤워스 갤러리가 가져온 미국 작가 마크 브래드포드의 작품이 개막일 62억원에 거래됐다. 내 주머니 한도는 620 만원, 아니다. 어디서 거짓말이냐. 최대한으로 상정해도 300만원을 넘어 서는 안 될 것 같다. 재산세 등등 내고 나면 통장에 남는 게 별로 없다. 그 러니 프리즈 서울은 눈호강으로 끝나야 마땅한 행사다. 키아프 서울은 좀 낫다. 한국 작가들 그림 중에서는 눈 딱 감고 살 수 있을 법한 가격의 것들 이 꽤 있다. 문제는 이놈의 눈이다. 그림 좋아하고 인테리어 좋아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단점은 눈이 높다는 것이다. 나는〈리빙센스〉독자들이매달 이토록 아름답고 비싼 물건들을 보면서 어떻게 충동구매의 욕구를 잠재울 수 있는지 모르겠다.〈리빙센스〉에디터들은 더욱 고통스러울 것 이다. 매달 이토록 아름답고 비싼 물건들에 대한 글을 쓰면서 어떻게 충동구매의 욕구를 잠재울 수 있는지, 정말이지 알 수가 없다. 가만 생각해 보니 더 고통스러울 사람들도 있다. 아트 잡지 에디터들이다. 가구는 아 무리 비싸도 62억원이라는 가격표를 붙이고 있지는 않다.
사실 올해 키아프 서울은 좀 실망스러웠다. 작년 성수동에서 열린 프리뷰 행사에서 느낀 실망과 동일하다. 나는 지금 한국 아트가 뭔지 잘 모르겠다. 사실 나는 거친 붓 터치가 살아 있는 유화를 좋아한다. 언젠가부터 키 아프 서울을 비롯한 한국 아트전은 비슷비슷한 팝아트로 넘치기 시작했 다. 팝아트라는 건 사실 꽤 위험한 장르다. 잘하면 키치한 매력이 있다. 못 하면 그냥 교보문고 에세이 코너에 있는 비슷비슷한 신간 커버 일러스트 같다. 나는 아티스트와 일러스트레이터의 경계가 있다고 믿는다. 그 경계 를 멋지게 허무는 사람들도 있다. 적지만 있다. 아티스트는 그림으로 무 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건지가 분명해야 한다. 그저 예쁘고 아름다운 것을 그리는 것으로 일러스트가 아트가 되지는 않는다. 키아프 서울에는 그냥 예쁘고 귀여운 팝아트가 지나치게 많았다. 작년에도 많았다. 앙증맞고 발칙한 소녀 캐릭터 아트는 이제 그만 나와도 될 것 같았다. 비슷한 소녀들이 지나치게 많다. 나라 요시토모의 후배들이 너무 많다.
그래도 굉장한 작품들이 있었다. 비쌌다. 이 글을 읽는 독자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우리는 저주받은 인간들이다. 어딜 가도 비싼 것만 눈에 들어온다. 가격표를 굳이 확인하고 싶어지는 물건은 언제나 그 가게에서 가장 비싼 것들이다. 내 어머니는 항상 나에게 말했다. “너는 눈이 그리 고급이라 우짜노?” 통장 잔고도 고급이어야 할 거라는 걱정이다. 고급인 눈에 보이는 그림들의 고급 가격을 확인하면서 나는 갤러리 직원들에게 굳이 말했다. “아, 괜찮네요. 고맙습니다.” 뭐가 괜찮다는 소리냐. 가격이 괜찮다는 소리냐, 너무 비싸서 일찍 포기할 수 있으니 괜찮다는 소리냐. 두 의미를 동시에 지닌 소리였다. 돈 없는 30대 초반 시절 편집숍에서 질샌더 코트 가격을 확인하고 직원에게 했던 말도 “괜찮네요”였다. 안 괜찮았다.
괜찮은 작품들이 있었다. 한국 작가의 유화였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프랜시스 베이컨이 떠오르는 뒤틀린 인체의 형상이 캔버스 위에 마구 쏟아져 있었다. 100호짜리 그림이 가득했다. ‘이 양반은 큰 그림을 그리는 분이구나’ 생각하며 안심했다. 큰 그림은 어차피 비싸다. 작가 이름을 확인했다. 김기석. 정보가 별로 없다. 1972년 서울 출신이다. 놀랍게도 고려대학교 공학석사 출신이다. 공학자 출신 아티스트라는 건 들어본 적도 없다. 너무 마음에 들어 한동안 그 갤러리 공간에 머물렀다. 갤러리스트가 별로 말이 없는 남자였다. 손에 딱 들어오는 사이즈의 작은 그림이 있었다. 말이 별로 없는 갤러리스트에게 가격을 물었다. “200만원입니다.” 네? 이건 흔쾌히 살 수 있는 가격이다. 다만 키아프 서울에는 다른 갤러리도 많다. 다른 그림도 많다. 일단 좀 돌아보고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갤러리스트가 조근조근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면 아마 바로 구입을 했을 것이다. 이 양반은 말이 참 없었다. 물론 갤러리스트가 말이 많을 필요는 없다. 살 사람은 사고 갈 사람은 간다.
2시간 뒤 나는 지쳐 나가떨어진 채 키아프 서울 중간에 있는 태극당에서 모나카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숨을 돌리고 있었다. 그 갤러리가 어딘지 찾아야 했다. 그럴 힘이 없었다. 게다가 머릿속에는 그나마 구입할 만한 가격의 그림들이 여럿 떠올랐다. 허리도 아프고 머리도 아팠다. 지천명이 되면 깨닫는 사실이 하나 있다. 육체가 곧 정신을 지배한다는 사실이다. 운동을 해야 한다. 운동을 하지 않으면 마감도 늦어지고 그림 하나 사는 것도 힘들어진다. 그 갤러리를 다시 찾을 생각을 하니 사우론의 눈을 보며 이미 지쳐버린 호빗이 된 기분이었다. 키아프 서울은 중간계처럼 너무 크다. 내 정신은 육체의 한계에 굴복했다. 입구가 코앞에 보였다. 나는 택시를 스마트폰으로 예약하며 코엑스 바깥으로 탈출했다. 나 같은 인간은 절대〈반지의 제왕〉의 주인공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후회하고 있다. 독자 여러분도 아는 원칙이 하나 있다. 뭐든 보일 때 사야 한다. 다른 것 좀 보고 와서 사야지. 이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지난 수십 년간 지킨 원칙을 키아프 서울에서는 지키지 못했다. 작가 이름은 기억하고 있다. 이 양반 전시에 가야겠다. 손바닥만 한 그림이라도 가져야 할 것이다. 아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통장 잔고를 원더브라처럼 끌어모아 약간 더 큰 그림을 사게 될 것이다. 100호짜리는 어차피 곤란하다. 한국 아파트에는 그걸 걸 공간이 없다. 그렇다면 좀 더 큰 집으로 이사를 가야 할까. 이 집을 판다면 조금 외곽에 더 큰 집을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 나는 그림을 좋아하는 여러분이 빠지기 쉬운 망상의 함정에 빠져들고 있다. 왜 이 나이의 고민은 항상 부동산으로 귀결되는가. 왜 예술을 고민하다가 세속적인 팔자를 고민하게 되는 건가. 결국 이 글도 눈만 고급으로 늙어가는 늙은 남자의 투정으로 끝나게 됐다.
김도훈 @closer21
오랫동안 〈씨네21〉에서 영화기자로 일했고 〈GEEK〉의 패션 디렉터와 〈허핑턴포스트〉 편집장을 거쳐 《이제 우리 낭만을 이야기합시다》, 《나의 충동구매 연대기》라는 책을 썼다. 평생(?)에 걸쳐 수집한 물건들과 아름다운 물건들이 공존하는 그의 아파트는 이상하고 아름다운 김도훈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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