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무심코 마시는 차 한 잔에도 저마다의 사정이 담겨 있다. 아침마다 ‘스페셜티 원두’의 향으로 하루를 열고, 오후에는 정성스레 거품을 낸 ‘말차’나 ‘보이차’로 리프레시하는 이 시대의 도시인에게, 차와 커피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다. 자기 취향의 표현이자 자기 관리의 루틴이며 명상의 매개체다. 그러나 이 작은 잔의 여정에는 우리가 모르는 진실들이 숨어 있다.
10년도 훨씬 전의 일이다. 런던 쇼디치 지역을 걷다가 발견한 작은 카페가 있다. 특이한 이름에 이끌려 안으로 들어섰다. Ethical Coffee윤리적 커피라는 거창한 이름의 작지만 아주 모던한 분위기의 카페였다. 턱수염이 덥수룩한 젊은 주인장에게 에스프레소 한 잔을 주문했다. 따듯하게 데워진 작은 커피잔 속의 아름다운 크레마가 심장을 뛰게 했다. 바에 서서 한 모금 홀짝이는데 주인장이 말을 걸어왔다. 이 커피는 환경 친화적인 지속 가능한 농법으로 재배되었단다. 파트너인 에티오피아 커피 농장과의 윤리적이며 공정한 직거래를 통해 노동자들이 정당한 임금을 받고 일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고도 했다. 일회용품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테이크아웃을 하려면 텀블러는 필수다. 영국인들의 머그잔 사랑을 보여주듯, 이 카페의 단골들 가운데는 자신이 아끼는 머그잔을 직접 들고 와 커피를 사가는 사람도 많았다.
커피 찌꺼기는 지역 농가에 퇴비로 제공되어 유기농 농산물을 기르는 데 활용된다고 했다. 그야말로 한 잔의 커피에 지속 가능한 생명의 순환 고리가 담겨 있었다. 나름 커피 마니아였던 내 커피 생활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 순간이었다. 좋은 원두를 구별할 줄 아는 척하고 맛과 풍미만을 따졌던 이전의 내가 창피하게 느껴졌다. 한 잔의 커피가 우리에겐 단순한 ‘쉼’의 순간일 수 있지만, 사실 그 잔 안에는 파괴되는 숲, 작은 농가의 땀방울과 노동착취, 운송 과정에서 발생하는 대량의 탄소 배출, 커피 부산물과 폐기물 처리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깊이 고민하고 개선해 나가야 할 수많은 장면이 담겨 있다. 어떤 사람은 커피 한 잔 하면서 그런 것까지 생각해야 하냐며 혀를 차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이 일상적으로 즐기는 커피와 차의 지속 가능성 문제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을 자세히 알고 나면 생각이 바뀔 것이다.
기후변화는 이미 커피 벨트를 뒤흔들고 있다. 에티오피아, 콜롬비아, 브라질 등 커피의 고향이라 불리는 지역에서 이상기온과 병충해, 가뭄이 겹치며 생산량이 급감하고 가격은 급등하고 있다. 향후 30년 안에 현재 커피 재배지의 절반 이상이 사라질 수 있다는 연구도 있다. 이런 위기 속에서도 커피 애호가들은 늘어나고, ‘나만의 한 잔’을 찾는 열정은 더 깊어진다. 하지만 우리가 즐기는 ‘스페셜티 커피’의 향 뒤에는 종종 착취 구조가 자리한다. 공정무역 인증을 받지 못한 농가의 하루 임금은 한 잔의 라테 값보다 적은 경우가 많다.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윤리적 카페’, ‘공정무역’, ‘다이렉트 트레이드Direct Trade’가 등장했다. 이러한 제도는 커피 재배 농가의 ‘지속 가능한 소득’을 보장하기 위한 장치이다. 정당한 임금의 지급은 땀 흘린 농부의 급여, 그들 자녀의 학비, 마을의 깨끗한 식수가 걸려 있기에 중요한 문제다. 일부 로스터리들은 농가와 직접 계약을 맺고, 생산자 이름을 라벨에 새긴다. 요즘은 커피 원두의 품질과 향만큼이나 어디서, 누가, 어떻게 생산했는지 또한 중요하게 보는 시대가 됐다. 유럽연합EU은 2025년부터 ‘산림 파괴 없는 제품 규제EUDR’를 시행하기로 했다. 커피와 차를 유럽에 수출하려면, 단순히 ‘친환경 재배’가 아니라 ‘이 농장이 2020년 이후 숲을 파괴하지 않았다는 증빙과 함께 위도와 경도 좌표’까지 제출해야 한다. 커피 가공에는 많은 물과 에너지가 사용되는데, 최근 기업들은 세척수를 순환 재활용하거나 로스팅 에너지를 절감하는 저탄소 기술을 적극 도입하고 있다.
스타벅스는 전 세계에서 6000개 이상의 ‘그리너 스토어’를 운영 중이며 드라이브스루 주문에도 개인 컵 사용을 확대하고 있다. 심지어 기후변화에 강한 커피 묘목 1억 그루를 파트너 농가에 배포하고 지속 가능한 농법도 전수하고 있다. 블루보틀은 우유가 탄소 배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는 과학적 데이터를 바탕으로 ‘저탄소 메뉴’를 도입했으며 탄소중립 공급망 구축에도 적극 뛰어들었다. 참고로 355ml 블랙커피의 탄소 배출량은 약 0.26kg CO2e인 반면, 라테는 무려 0.84kg Co2e까지 치솟는다. 그 차이는 전부 ‘우유’ 때문이다. 즉 우유의 양을 줄이거나 식물성 두유 등으로 바꾸는 것만으로도 탄소 배출을 3분의 1이상 줄일 수 있다는 것은 의외로 많은 사람이 모르는 과학적 진실이다.
한편, 세계는 다시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명상’, ‘루틴’, ‘슬로 라이프’ 등이 새로운 가치로 자리 잡으면서 차 한 잔은 정신적 안정을 찾고 건강하게 나를 채우는 시간을 상징하게 되었다. 특히 말차matcha는 ‘식물성 카페인’이라는 친환경 이미지와 함께 서양의 웰니스 산업을 장악했다. 인스타그램에는 초록빛 말차라테와 차센대나무 거품기의 미학이 넘쳐나고, 명상 관련 콘텐츠에는 ‘차 명상’ 가이드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 평화로운 이미지에도 그림자는 있다. 일본과 중국의 주요 말차 생산지에서는 급증하는 수요로 집약적 농업이 가속화되고 있다. 플라스틱 포장재, 항공 운송으로 인한 탄소 배출, 그리고 농약 사용 문제까지, 그윽한 향기를 품은 건강한 차의 이면은 반드시 건강하지만은 않다.
이런 이유로, 세계 곳곳에서는 ‘리제너러티브 티Regenerative Tea’ 운동이 일고 있다. 이는 단순히 친환경을 넘어, 땅을 회복시키는 농업을 뜻한다. 잎을 따는 방식, 토양의 생태계, 지역 공동체와의 관계까지 고려하는 생산 방식이다. 지속 가능한 차 산업 발전을 위한 기업들의 노력도 확대되고 있다. 영국의 차 제조 기업인 트와이닝Twinings은 차 농장의 주거·위생·교육 환경을 개선하는 노력으로 차 생산자와의 상생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요크셔 티Yorkshire Tea는 대체에너지 확대와 시스템 혁신으로 차 생산에 탄소중립을 달성하여 전 제품에 ‘CarbonNeutral®탄소중립’ 인증을 붙이게 되었다. 누미 오가닉 티Numi Organic Tea는 자연으로 생분해되어 돌아가는 식물성 컴포스터블 포장을 확대하고 있다. 그래서 요즘 떠오르는 키워드는 ‘지속 가능한 카페 문화’다.
서울의 한 카페는 우유 대신 귀리우유와 두유를 기본 옵션으로 제공하고, 손님은 리유저블 컵을 가져오면 할인을 받는다. 오설록은 제주에서 유기농 인증을 받은 차를 재배하고, 제로웨이스트 카페들은 리유저블 컵을 기본 옵션으로 제공한다. 서울시 역시 일회용컵 보증금 제도와 개인 컵 할인 캠페인을 확대하며, ‘리유즈가 습관이 되는 도시’를 실험 중이다. 런던의 유명한 카페 ‘그라인드Grind’는 커피 캡슐을 생분해 가능한 재질로 바꾸며, 뉴욕의 ‘카페 그라운드’는 남은 커피박을 비누나 퇴비로 재활용한다. ‘제로웨이스트’는 더 이상 윤리적 선택이 아니라 상식이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변화는 소비자의 의식이다.
우리는 이제 “이 커피는 어디서 왔을까?”, “이 찻잎은 어떤 땅에서 자랐을까?”를 묻기 시작했다. 나의 아침 루틴이 지구를 망치지 않도록, 나의 한 모금이 누군가의 삶을 지탱하는 데 도움이 되는 그 질문이 커피와 차를 즐기는 새로운 윤리적 가치이자 스타일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쉽게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가장 먼저 공정무역, 오가닉 인증 등을 확인하고 재생 농업 등 자연과 공생하기 위해 노력하는 브랜드를 구매하는 것이다. 생산자 이름 등, 출처가 명확한 원두와 찻잎을 고르는 것도 중요하다. 그리고 가능하면 우유를 줄이거나 식물성 음료로 대체하고, 차는 폐기물이 나오는 티백보다 잎차 그대로 즐기는 것이 좋다. 라테보다는 아메리카노처럼 레시피를 한 단계 가볍게 하면 에너지 사용량과 탄소 배출 또한 줄일 수 있고 원재료 본연의 맛과 향도 더 잘 즐길 수 있다. 커피 찌꺼기나 다 우려낸 찻잎은 화분 흙에 살짝 섞으면 천연 퇴비로 순환할 수 있다. 일회용품은 이제 우리 삶에서 떠나 보내는 것이 좋다.
오늘 당신의 손에 쥔 잔이 무엇이든, 그 안에는 누군가의 땀방울, 한 줄기의 햇살과 비, 그리고 우리가 공유하는 지구의 시간이 담겨 있다. 커피를 마시기 전 또는 차를 우려내기 전, 잠시 향을 맡고 숨을 고르며 이 커피와 차가 나에게 오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생각해 보고 감사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가장 지속 가능한 명상 루틴일지 모른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더 이상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하루의 작은 의식을 통해 지속 가능한 차와 커피 문화를 만들어가는 참여자가 되어간다. 지속 가능성은 선언이 아니라 매일의 선택이다. 그렇다면 이제 묻자! 당신은 오늘 지속 가능한 한 잔을 선택했는지.
유명훈 @sustainable.mark
국내 1호 지속가능경영 컨설턴트이자 ESG 전문가. ‘마크’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한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위한 전략을 수립하는 ‘koreaCSR’ 대표이자 ‘존경과 행복’ 출판사의 발행인이기도 하다.《밀도 있는 삶을 위한 인문학》의 저자로 지난 20여 년간 100개 이상의 컨설팅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매년 100회 이상의 강연을 소화하고 있다. 강연할 때 입는 옷 하나도 지속 가능한 브랜드의 제품으로 착용할 정도로 세심히 신경 쓰는 그는, 현재 한서형 향기 작가와 함께 경기도 가평 ‘존경과 행복의 집’에서 거주하며 일과 삶 모두에서 지속 가능성을 실천하고 있다.
editor송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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