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그림의 ‘맛’다른 여행 34
칸딘스키와 가브리엘레 뮌터라는 새 시대의 문을 연 두 예술가의 사랑과 창작, 그 복잡하고도 빛나는 관계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미술관. 이곳은 블라우어 라이더, 즉 ‘청기사파’라 불리는 유럽 전위예술운동의 진원지이자, 칸딘스키가 표현주의에서 추상미술로 도약하는 그 모든 지점을 지켜본 미술관으로, 마치 두 사람의 영혼이 잠시 머무는 곳처럼 느껴진다.
칸딘스키와 뮌터는 단순한 연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서로의 예술에 깊이 개입한 동료였고, 창작의 영감을 나눈 동반자였다. 러시아에서 독일로 건너온 칸딘스키는 뮌헨에서 뮌터를 만나고, 그녀의 격려 속에 본격적인 실험에 나선다. 칸딘스키가 추상의 길을 걷게 되는 전환점에서 뮌터는 그와 함께 여행을 다니고, 드로잉을 정리하고, 그의 글을 번역하며 기록자로서의 역할을 했다. 그리고 칸딘스키가 독일을 떠난 후에도 뮌터는 그의 작품과 유산을 지켜냈다. 훗날 이 작품들을 미술관에 기증하면서 렌바흐하우스는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칸딘스키 컬렉션을 가진 미술관 중 하나가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칸딘스키의 대표작인 ‘구성 Ⅶ’, ‘즉흥’ 연작, 그리고 초기 표현주의적 색채 실험이 담긴 작품들이 이곳에 전시되어 있다. 추상의 문을 연 화가답게 그는 색을 단지 시각적 요소가 아닌 ‘정신적 울림’을 지닌 존재로 다뤘다. 그의 그림에는 감상이 아니라 일종의 음악처럼 느껴지는 ‘감정의 진동’이 있다. 이러한 감수성은 뮌터와 함께한 시절, 두 사람이 머물던 뮌헨 근교의 마을 무르나우에서 특히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 시기 칸딘스키는 자연에서 받은 감각적 자극을 해체하고 재조합하며 ‘보이는 것 너머’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는 그가 미술사에서 추상회화의 선구자로 불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데, 1910년경 그는 ‘첫 추상 수채화’를 완성하며 회화가 대상을 재현하지 않아도 감정과 영성을 표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었다. 음악의 무형성과 회화의 시각성을 결합하려는 그의 시도는 이후 몬드리안, 말레비치, 로스코 같은 작가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끼친다. 그는 색채를 하나의 독립된 언어로 다뤘고, 선과 형태는 마치 작곡의 음표처럼 배열되었다. “내게 그림은 눈이 아니라 귀로 느끼는 것이다.” 그의 이 문장은 칸딘스키 예술의 본질을 가장 명확히 설명한다.
한편 뮌터 역시 무르나우에서의 시간을 통해 자신만의 화풍을 정립했다. 그녀의 색감은 선명하고, 형태는 단순하며, 화면은 깊은 고요를 품고 있다. 그녀는 전통적인 구도에서 벗어나 본질적인 감정과 기운을 화면에 담아냈고, 이는 블라우어 라이더청기사파의 정신과도 깊게 닿아 있다. 뮌터는 종종 칸딘스키의 조력자로만 평가되지만 실은 당대 표현주의 회화의 독창적인 화가로, 독일 전통 민속미술에서 영향을 받은 선명한 선과 평면적인 색채를 통해 일상의 정경과 인물에 감정을 불어넣었다. 특히 그녀의 여성 초상화들에서 드러나는 내면의 힘은 동시대 남성 작가들의 시선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이처럼 무르나우에서의 공동 작업은 두 예술가에게 결정적인 전환점을 제공했다. 칸딘스키는 뮌터와의 교류 속에서 추상회화의 기반을 세웠고, 뮌터는 칸딘스키의 시도와 이론을 자기만의 언어로 흡수해 강렬하고 독립적인 작업을 이어갔다. 두 사람은 예술적으로 엮였을 뿐 아니라, 단지 화가들의 그룹을 넘어 하나의 미학적, 정신적 공동체를 이루며 미술사 전체에 남을 ‘실험의 시간’을 함께한 것이다.이 렌바흐하우스는 그런 의미에서 칸딘스키의 추상이 단절과 혁명이 아닌, 관계 속에서 태어난 유기적 움직임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소다. 이곳에 소장된 뮌터의 작품들과 칸딘스키의 초기 추상은 나란히 놓여 있으며, 그 사이엔 묵직한 침묵이 흐른다. 하지만 그 침묵이야말로 예술이 서로에게 건넨 대화이자, 시대를 넘어 지금 우리에게까지 도달한 깊은 울림이다.
렌바흐하우스의 내부는 과거와 현재, 고전과 현대가 공존하는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 이 건물은 화가 프란츠 폰 렌바흐의 저택이었으나, 이후 공공 미술관으로 전환되며 뮌터의 기증 컬렉션이 더해졌다. 미술관은 단순한 작품 전시의 공간을 넘어, 두 예술가의 시간과 감정이 고스란히 아로새겨진 일종의 기록보관소이자 정신적 공간이 되었다.
전시를 다 보고 나오면, 자연스럽게 미술관 내에 위치한 카페 ‘ELLA’로 발걸음이 이어진다. 이 이름은 칸딘스키가 뮌터를 부르던 애칭 ‘엘라’에서 따온 것이다. “Dear little Ella”라 적힌 그의 편지 속 문구는 이제 공간의 이름이 되어 관람객을 맞이한다. 조용하고 세련된 인테리어, 쾨니히스플라츠를 향해 열린 테라스, 그리고 담백한 메뉴들까지. 전시의 여운이 스며든 상태에서 마주하는 이곳의 분위기는 마치 작품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미술관이 문을 닫은 후에도 카페는 늦게까지 문을 열어, 하루를 정리하며 예술의 잔향을 천천히 되새기기에 더없이 좋은 공간이다.
한 모금의 커피와 함께 눈앞에 펼쳐진 클래식한 광장의 풍경을 바라보며, 문득 칸딘스키가 색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내면의 조화’가 이해되는 듯한 순간이 찾아온다. 이곳에서의 감상은 단지 시각에만 머물지 않는다. 삶과 예술, 사랑과 이별, 기록과 기억. 그것들이 엘라의 테이블 위로 조용히 내려앉는다. 그리고 나도 그 찰나의 감정 안에 깊이 스며들게 된다.
오그림 @ohgrim_
예술을 향유하는 방법을 친절하게 공유하고 알려주는 브랜드 ‘아트살롱 오그림’을 운영한다. 여행을 좋아하며, 여행지에서 만나는 예술 작품에 특히 더 애정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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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심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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