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치에서 판화, 이제는 유화 작품으로 작업 세계를 넓혀가고 있는 김한영 작가를 만났다. 색과 빛이 만들어내는 이야기.


MARK TETTO

JTBC〈비정상회담〉의 훈남 패널로 이름을 알렸다. 한국 생활 14년 차, 북촌의 한옥 마을에 거주하며 한국 전통의 아름다움을 매일 누리고 있다. 경복궁 명예 수문장을 역임하고, 한국 공예품과 문화유산에 관심이 많은 그는 한국을 사랑하는 외국인 중 한 명. 매달〈리빙센스〉와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들을 만나 그들의 작품 세계를 소개하고 있다.

 

김한영 KIM HAN YOUNG

홍익대학고 미술대학 서양학과를 졸업하고 설치에서부터 판화, 유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섭렵했다. 최근 작은 기름을 거의 사용하지 않은 유화물감을 붓끝으로 찍어내며, 물감 본연의 점성과 무게를 화면에 하나씩 축적한 작품들이다. 캔버스 표면 위에 뿔처럼 솟아오른 물감의 흔적들은 빛을 만나면서 새로운 풍경을 완성하며, 작가의 수행과도 같은 작업은 현대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물감을 점처럼 찍어서 완성한 김한영 작가의 작품. 작업실에 겹겹이 서 있는 작품들이 만들어내는 색의 조화 역시 아름답다.

색이 가진 이야기

마침 가을이 찾아오는 길목이었다. 김한영 작가와 거리를 걷다가 은행나무 가로수를 보고 이야기가 시작됐다. 은행잎은 초록에서 노란빛으로 스스로의 색을 바꿔가고 있었고, 작가에게는 그 각각의 색들이 모두 특별했다. “저 나무들을 보세요. 노랗게 단풍이 들어가고 있지만 같은 색은 하나도 없잖아요? 그게 바로 자연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이고, 색이 가진 이야기이죠.” 김한영 작가에게 자연은 영감의 원천이다.

 

다양한 장르를 거치며 이제 유화 작업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펼치고 있는 김한영 작가.

 

 

저 나무들을 보세요. 노랗게 단풍이 들어가고 있지만

같은 색은 하나도 없잖아요?

그게 바로 자연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이고,색이 가진 이야기이죠.

 

마음이 닿는 곳에 점을 찍는다는 김한영 작가.
마음이 닿는 곳에 점을 찍는다는 김한영 작가.

처음엔 자연의 색 그대로를 사용했다가, 요즘엔 파란색을 위주로 작업 중이다. 파란색이 주인공이지만, 작가는 여기에 다른 색을 아주 조금씩 섞어 색에 다른 표정을 준다. 그리고 그 색들은 캔버스 위에 모여 어떤 깊이와 서사를 만들어가는데, 작품을 마주하다 보면 그 긴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색의 길을 만들기 위해서는 캔버스에 마스킹테이프를 붙여서 칠한 후 떼어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쌓여있는 마스킹테이프도 하나의 작품처럼 보인다. 
색의 길을 만들기 위해서는 캔버스에 마스킹테이프를 붙여서 칠한 후 떼어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쌓여있는 마스킹테이프도 하나의 작품처럼 보인다. 

붓으로 물감을 한점 한점 찍어서 작품을 완성해 낸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 점마다 숨겨진 사연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하고야 만다. 힘껏 찍은 그 점들은 우리를 어떤 이야기로 인도하게 될까?

 

 


M 얼마 전 포도뮤지엄에서 열린 전시에서 작가님의 작품을 보고 반했어요. 이렇게 서울에서 인터뷰할 수 있게 돼서 너무 기쁩니다.

저는 오랫동안 설치와 판화를 주로 하다가 유화는 시작한 지 한 8년 정도밖에 안 된, 신인 작가예요(웃음). 아직도 갈 길이 멀고, 배우고 싶은 것들이 많아요.

 

M 설치나 판화를 전공하셨나요?

아니요, 저는 서양화를 전공했어요.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고, 주변에서 칭찬도 많이 받았습니다. 아버지께서 어린 저를 미술 대학교 앞에 데리고 가셔서, 앞으로 훌륭한 화가가 되라고 격려해주기도 하셨죠. 입시에서는 디자인학과에 합격했는데, 서양화를 전공하고 싶어서 재수를 할 정도로 그림 그리는 것에 대한 열망이 있었죠. 학부에서 회화와 판화 등을 배웠는데,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설치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죠. 당대 예술계에 대항하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어요. ‘난지도’라는 그룹에서 활동하면서 해체 미학을 펼치기도 했죠.

 

물결을 표현한 작품.

M 굉장히 다이내믹한 젊은 시절을 보내셨을 것 같아요. 설치미술은 어떤 점에서 작가님에게 매력적이었나요?

제가 학교에 다닐 때가 정치·사회적으로 격변기였는데요. 당시 유행하던 흐름이 민중미술이었고, 나머지는 각개전투식이었죠. 저는 학교에서 배우는 예술에 대해서는 반항심이 있었어요. 그런 심리를 표현할 수 있는 장르가 설치였죠. 논리적이거나 깨끗하지는 않지만, 사물을 매달고 깨뜨리고 해체하면서 현실의 이면을 바라보고, 모순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M 판화는 또 어떤 면들이 작가님을 사로잡았나요?

대학 재학 중에 송번수 작가님 밑에서 오랫동안 배웠는데요. 그분 덕분에 목판화에 빠져들었죠. 작가님은 볼록 판화 기법을 사용하셨는데, 조각의 질감이나 색의 표현이 굉장히 강렬하죠. 어떻게 판을 조각하고 물감을 바르느냐에 따라 표현의 깊이가 완전히 달라지거든요.

 

작가의 초기 작품으로, 작은 꽃이 피어 있는 꽃밭을 보고 완성한 것이다. 

M 설치와 판화를 거친 후 본격적으로 유화 작업이 이어져서 그런지 작가님의 작업에서는 입체적인 아름다움이 느껴져요.

언젠가부터 판화를 계속할 것인지 새로운 작업에 도전할 것인지 고민을 많이 했는데요. 풍경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드는 거예요. 결국은 다시 서양회화로 돌아와서 유화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물감을 캔버스에 바른다기보다는 찍어내는데, 그러면 물감의 점성 때문에 뾰족하게 표현이됩니다.

 

M 유화에서는 주로 풍경을 마음에 두고 그리는 건가요?

초기 작품을 보면 주로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것들이에요. 화단에 피어난 작은 꽃들을 보고 그걸 표현하곤 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구상화와 추상화의 경계에 있기도 해요.

마크 테토와 함께 물감을 찍어보는 김한영 작가.

M 약간 인상주의 화풍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제 작품에 인상주의는 없어요. 단지 서로 엉키는 그런 느낌, 그것만 생각하고 그립니다. 자연을 그대로 그릴 필요는 없지만, 빛을 받으면 그림자가 생기고 그 표현 방식도 바뀝니다. 그건 제가 그린 것이 아니고 빛이 완성하는 것이죠. 

 

M 재료도 한 가지만 사용하는 건가요?

저는 오직 유화물감만 사용합니다. 이 작업을 시작할 때 생각한 것이 있는데, 르네상스 시대 작가들의 작업 정신으로 돌아가고 싶었어요. 렘브란트나 고흐 모두 물감 하나만 갖고 작업을 했잖아요. 표현하고자 하는 질감을 만들기 위해 다른 무언가를 섞은 게 아니에요. 물론 그때는 섞을 재료도 없었겠지만, 저는 그 정신을 이어가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지금까지도 유화물감만을 고집해요. 그 물감만이 가진 매력과 내 욕심, 이 2가지가 순수하게 엉켜서 제 작품을 완성하는 겁니다.

 

마크 테토에게 작업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김한영 작가. 하단에 붉은색이 기운이 도는 작품은 석양을 표현한 것이다.

M 작가님의 작품을 처음 접할 때 색감이 먼저 눈에 들어왔는데, 말씀을 들어보니 자연을 담으려고 했네요. 주로 어떤 것들이 작가님이 눈에 들어왔나요?

작품에 주로 담으려는 것은 풍경이에요. 지금 작업하고 있는 것은 해 질 녘의 노을이고요. 캔버스에 공기의 흐름, 감정 등을 담아보려고 했어요. 제 그림이 단색화처럼 느껴지는 경우도 있을 텐데, 단색화는 화면에서 일어나는 현상적인 결과물을 담은 것들이에요. 제 작품은 컬러가 하나처럼 보여도, 제가 표현하고자 하는 구체적인 대상이 있기 때문에 다양한 색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M 그래서인지 작품을 바라보면 뭔가 상상이 되는 그런 매력이 있어요. 한국의 자연에서 보이는 미감도 느껴지고요.

저는 제 그림 안에 이야깃거리를 많이 집어넣으려고 해요. 지평선을 그릴 때는 하늘과 땅 사이의 사연을 담으려고 했고요. 최근 포도뮤지엄 전시에서는 제주의 아지랑이를 표현하려고 했어요.

 

지난 8월까지 제주의 포도뮤지엄에서 열린 전시〈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에 전시된 김한영 작가의 작품들.
지난 8월까지 제주의 포도뮤지엄에서 열린 전시〈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에 전시된 김한영 작가의 작품들.

M 처음엔 다양한 색을 사용하다가 최근작들은 주로 파란색이더라고요.

파란색은 스펙트럼이 정말 다양합니다. 어떤 색을 섞느냐에 따라 정말 다양한 색이 만들어집니다. 우리가 파란색을 표현하는 단어가 정말 많은 것처럼요. 아직도 파란색 안에서 탐구하고 배워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M 표면의 질감은 찍어내는 듯이 작업한 것과 물결처럼 작업한 것 2가지로 보이는데요. 작가님만의 기법도 재미있어요.

저는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제여란 작가님, 하종현 작가님 등 여러 선배님들의 작업을 보며, 기법이 만들어내는 표현의 깊이를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작품을 볼 때마다, 저는 오히려 ‘그리지 않으려는 태도’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제여란 작가는 다양한 도구를 사용하지만, 그 도구가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는 작가 자신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하종현 작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천 위에 물감을 칠한 뒤, 그 뒷면으로 밀어내는 방식을 씁니다. 물감을 사용하는 이는 작가이지만, 뒷면에 어떤 형상이 나타날지는 작가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지요.

 

M 빛이 그림을 완성할 것이니, 비슷한 경지에 온 것이 아닐까요?

하하. 네, 그런 기대감은 있어요. 저도 빛의 위치나 세기에 따라서 제 작품이 어떻게 표현을 달리하는지 좀 더 연구하고 싶어요. 언젠가는 빛의 변화에 따른 영상을 제작해 봐도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저는 지금 신인 작가의 마음으로 뭐든지 해볼 열정이 있어요. 앞으로 어떤 작품을 하게 될지 저도 정말 기대돼요.

 

 


CREDIT INFO

editor심효진 

photographer김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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